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선생님 24주기 추모식 추도사
청명(靑冥) 선생님께서 이곳에 아름다운 한학(漢學)의 터전을 닦아놓고 우리 곁을 떠나신지 벌써 24년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 가는 듯하지만 남기신 유산은 갈수록 더욱 뚜렷해져 갑니다. 선생님께서 추구하셨던 학문적 지향과 실천적 태도가 현재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형이상학적 세계관보다는 경험적이고 과학주의적인 세계관을 선호하셨는데, 이러한 경향은 선생님께서 경험적 역사적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금석문(金石文)에 대한 탐구를 통하여 확립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학문적 태도는 바로 실사구시의 실증적 정신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학문적 관심은 유구한 역사적 연원을 갖는 금석학과 함께 서지학, 문집독해, 초서, 서예, 한문해석방법 등 여러 분야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학문은 이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실천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지식인들이 사회현실에 대하여 비판을 모르고 오류를 교정하는 운동에 나서지 않으면 자기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여, 지식인이 학문을 탐구하는 본령이 실천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러한 실천을 강조하는 자세는 1960년 4월 교수데모를 주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태동고전연구소 설립, 문화재위원장 역임, 청명문화재단 설립 등 이후 여러 실천적 활동을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특히 별세하시기 바로 전에 선생님의 학문적 실천적 유산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하여 1998년 청명문화재단을 설립하시고 『통일시론』을 2000년까지 3년간에 걸쳐 발간하셨습니다.
현재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에 따른 초지능‧초연결 시대에 생각하고 학습하는 인공지능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ChatGPT가 세간의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반면, 국제적 군사외교적으로는 신냉전시대가 도래하여 대한민국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대립충돌 국면의 긴장을 높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시점에 현 정부는 국가적 민족적 자존심과 역사적 주체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주변 강대국의 힘에 이끌리고 표류하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선생님께서 강조하고 실천의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던 ‘통일’의 과제는 더욱 난해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반도 통일정책과 한국교회 통일운동에 대한 디아코니아 신학적 평가」(엄상현, 수동교회)를 주제로 하는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디아코니아’는 봉사와 섬김을 뜻한다고 합니다. 국가와 정치이념을 넘어선 ‘봉사와 섬김’의 정신을 통하여 남북한 민족을 통일하고자 하는 교회차원의 실천운동을 주제로 한 연구라 하겠습니다. 청명 선생님께서는 『통일시론』 창간 취지문에서 “우리 민족이 자유, 평등, 평화, 화해에 의해 통일된 민주적 공동체로 나아가는 일은 민족 성원 모두의 염원이자 우리 시대가 짊어진 가장 무거운 책무가 아닐 수 없다. 왜곡되고 굴절된 민족의 현대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기도 하다”고 하여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했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아침이 이를 것이라는 희망으로 통일의 미래를 열어가는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청명 선생님의 추모일을 맞아 선생님께서 남기신 정신적 실천적 유산을 계승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4월 12일
태동고전연구소 소장 엄연석 올림